[에필로그] 흩어진 모래알의 행방
혜진과 민준이 떠나고 3년이 흘렀다. 동훈은 여전히 그 8평 원룸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 방은 더 이상 지옥도, 감옥도 아니다. 그는 벽지를 새로 바르고, 민준의 낙서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서가를 들였다. 아이의 장난감이 굴러다니던 바닥에는 고가의 오디오 스피커가 자리 잡았다. 동훈은 승진했다. 가정을 잃은 대신 얻은 지독한 몰입의 성과였다. 회사 동료들은 그를 ‘완벽한 싱글’이라 부르며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동훈은 그저 웃어넘길 뿐이다. 퇴근 후 스탠드 불빛 아래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독서를 하는 시간, 동훈은 비로소 완전한 평온을 느낀다. 하지만 문득, 아주 가끔씩 심장이 저릿해지는 순간이 있다. 길을 걷다 민준이 또래의 아이가 "아빠!"라고 외치며 달려가는 것을 볼 때, 동훈은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서서 아이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응시한다. 주머니 속에는 여전히 3년 전 발견했던 그 파란 미니카가 들어있다. 이제는 칠이 다 벗겨져 볼품없어졌지만, 동훈에게 그것은 ‘한때 아빠였던 자신’을 증명하는 유일한 훈장이다. 그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다. 몇 번의 소개팅이 있었고, 호감을 보인 여성도 있었지만 누군가를 자신의 삶에 들이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유리성을 쌓는 일인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동훈은 이제 '영원한 사랑' 대신 '지속 가능한 고독'을 선택했다. 그는 혼자서도 충분히 단단해졌으며, 그 단단함은 다시는 누군가에게 배신당하지 않을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혜진은 펜트하우스의 안주인이 되었다. 진우와의 재혼 생활은 겉보기에 완벽했다. 넓은 집, 풍족한 생활비, 그리고 민준에게 쏟아지는 고급 교육의 기회. 혜진은 이제 더 이상 마트 전단지를 보며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의 SNS에는 해외여행 사진과 화려한 일상의 기록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혜진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서늘한 바람이 분다. 진우는 다정한 남편이지만, 동시에 철저한 통제관이다. 그는 혜진에게 과거 동훈과의 일을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했으며, 가끔 술에 취하면 묘한 우월감을 드러냈다. "결국 네가 돌아올 곳은 나였잖아. 그 바보 같은 놈 곁에서 고생만 하더니."라는 진우의 말에 혜진은 그저 입술을 깨물 뿐이다. 무엇보다 혜진을 괴롭히는 것은 민준의 질문이다. 아이는 가끔 잠들기 전, "엄마, 예전 아빠는 어디 갔어? 아빠가 나중에 보러 온다고 했는데..."라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혜진은 아이의 입을 막으며 서둘러 잠을 재운다. 혜진은 알고 있다. 지금의 화려함이 사실은 동훈의 희생과 준수(진우)의 집착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평화라는 것을. 그녀는 가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묻는다. 나는 정말 행복해지기 위해 그를 버린 것일까, 아니면 단지 더 크고 화려한 감옥을 선택한 것일까. 펜트하우스의 통유리창은 아름답지만, 그 유리를 깨고 나갈 용기는 이제 그녀에게 남아 있지 않다.

진우는 승리자였다. 동훈으로부터 혜진을 뺏어왔고, 자신의 친자인 민준을 되찾았다. 그는 동훈을 완벽하게 패배시켰다는 사실에 깊은 쾌감을 느꼈다. 그는 민준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아빠 노릇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진우의 내면에는 뿌리 깊은 불안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는 혜진이 동훈과 보냈던 6년이라는 시간을 질투한다. 비록 친자는 아니었지만, 동훈이 민준에게 쏟았던 헌신과 그로 인해 형성된 아이의 정서적 유대를 그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음을 느낀다. 민준이 무심코 보이는 습관들이 동훈을 닮아 있을 때마다 진우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그는 혜진을 더욱 집착적으로 구속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외출을 간섭하고, 핸드폰을 수시로 확인한다. 자신이 동훈의 아내였던 혜진을 뺏어왔듯이, 누군가 또 그녀를 가로챌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는 것이다. 진우의 사랑은 소유욕으로 변질되었고, 그가 쌓아 올린 쾌적한 아파트는 점점 혜진에게 숨 막히는 공간이 되어간다. 그는 승리했지만, 결코 평온을 얻지 못했다. 동훈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왔다고 믿었으나, 정작 동훈이 가졌던 '순수한 아빠의 마음'만큼은 빼앗아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준은 이제 초등학생이 되었다. 아이는 똑똑하고 건강하게 자랐지만, 또래 아이들에 비해 일찍 철이 들었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안다. 지금의 아빠(진우) 앞에서 예전 아빠(동훈)의 이야기를 꺼내면 집안 분위기가 싸늘해진다는 것을. 민준은 자기 방 서랍 깊숙한 곳에 보물 상자를 하나 가지고 있다. 그 안에는 예전 아빠와 찍었던 빛바랜 사진 한 장과, 아빠가 생일 선물로 사주었던 낡은 로봇이 들어있다. 진우가 사주는 비싼 태블릿과 드론보다, 민준은 가끔 그 낡은 로봇을 만지며 잠이 든다. 아이에게 동훈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약속'이다. 하지만 아이의 기억 속에서 동훈은 여전히 따뜻한 품을 가진 진짜 아빠로 남아 있다. 민준은 성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었지만, 자신의 뿌리 어딘가에 새겨진 동훈의 체온을 기억한다. 아이는 아마 평생을 그 기억의 조각을 품고 살아갈 것이다.

어느 주말, 대형 쇼핑몰에서 동훈은 우연히 세 사람을 목격한다. 화려한 옷차림의 혜진, 듬직한 모습의 진우, 그리고 부쩍 키가 큰 민준. 그들은 누가 보아도 완벽하고 행복한 가족의 표본이었다. 동훈은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가슴이 요동쳤지만, 그는 달려나가지 않았다. 민준이 웃으며 진우의 손을 잡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모습을 보며, 동훈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너만 행복하다면.'
혜진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지만, 동훈은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세 사람은 화려한 불빛 속으로 사라졌고, 동훈은 반대편 출구를 향해 걸었다. 각자의 삶은 이제 평행선이 되어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이다. 동훈은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주머니 속의 미니카를 꽉 쥐었다. 이제 정말로, 긴 여행이 끝났다. 그들은 각자의 성채 안에서, 혹은 각자의 고독 안에서 저마다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갈 것이다. 사랑했으나 소유할 수 없었던 것들, 그리고 소유했으나 결코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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