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의외로 고요한 법이다. 혜진과 민준이 떠난 지 사흘째, 8평 원룸의 공기는 차갑게 내려앉아 움직일 줄 몰랐다. 동훈은 퇴근 후 불도 켜지 않은 채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습관적으로 "민준아, 아빠 왔다"라고 말하려던 입술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멈췄다. 불을 켜자, 형광등이 몇 번 깜빡이다가 방안을 비추었다. 좁은 방은 6개월 전 동훈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훨씬 더 넓어 보였다. 세 사람이 부대끼며 살 때는 발 디딜 틈 없던 바닥이 이제는 시리도록 훤히 드러나 있었다. 동훈은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방 안 곳곳에는 여전히 그들의 흔적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주방 싱크대 선반 위, 미처 챙겨가지 못한 민준의 뽀로로 컵 하나. 욕실 구석에 남겨진 혜진의 머리끈 하나. 동훈은 그것들을 치우지 못했다. 아니, 차마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것마저 치워버리면 자신의 지난 6년이 완전히 소멸해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방을 정리하던 동훈은 냉장고 밑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손을 뻗어 꺼내보니, 민준이 아끼던 작은 미니카였다. 파란색 페인트가 여기저기 벗겨진, 아이의 손때가 묻은 장난감. 동훈은 그 작은 미니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차가운 플라스틱의 촉감이 손바닥을 타고 심장으로 전해졌다.
"이건... 안 가져갔네."
혼잣말이 텅 빈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동훈은 미니카를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문득 5년 전, 민준이 처음 태어나 조그만 손으로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꼭 쥐었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동훈은 세상의 모든 신에게 맹세했었다. 이 아이를 위해 내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노라고.
그 맹세는 거짓이 아니었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을지언정, 그 아이를 안고 느꼈던 벅찬 감동과 잠든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느꼈던 평온함은 가짜가 아니었다. 혜진의 배신이 드러나고 법정이 '친자 불일치'라는 판결을 내렸을 때도, 동훈의 몸이 기억하는 아빠로서의 감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무엇을 지키려 했던 걸까.'
동훈은 회상했다. 6개월 전, 그는 용서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다시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순수한 자비가 아니었다.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공포, 그리고 자신이 일궈온 '가족'이라는 성채가 무너졌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오만이었다. 그는 혜진을 죄인으로 곁에 묶어두며 자신의 상처를 보상받으려 했고, 아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사랑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혜진은 진우의 화려한 아파트로 떠났고, 민준은 새로운 아빠를 향해 웃었다. 동훈이 그토록 매달렸던 '나의 가족'은 사실 처음부터 그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6년이라는 시간 동안 타인의 가족을 잠시 빌려 썼던 이방인이었을 뿐이다. 동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낡은 방충망 사이로 밤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도시의 소음과 먼지 섞인 바람이었지만, 동훈은 그 바람을 깊게 들이마셨다. 가슴 속에 고여 있던 탁한 공기가 조금씩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제 받아들여야 했다. 혜진을 향한 증오도, 아이를 향한 애절한 미련도, 그리고 자신이 피해자라는 지독한 자기연민도 모두 이 방에 남겨두고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동훈은 책상 서랍을 열어 혜진과 맺었던 '동거 계약서'를 꺼냈다.
[누구에게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각자 떠나기로 한다.]
자신의 목을 조르던 그 문장이 이제는 묘한 해방감을 주고 있었다. 동훈은 라이터를 켜 계약서 모서리에 불을 붙였다. 종이는 순식간에 불꽃에 휩싸여 검은 재로 변해갔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난 혜진처럼, 이제 자신도 자신을 사랑해 줄 누군가를, 혹은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야 할 차례였다. 동훈은 외투를 걸치고 문을 나섰다. 방 안의 불은 끄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 나오다 뒤를 돌아보자, 낡은 빌라 3층의 작은 창문 하나가 유독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곳은 한때 세 사람의 숨소리로 가득 찼던 공간이었고, 이제는 한 남자의 고독이 영그는 공간이 되었다. 동훈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는 깨달았다. 삶은 때로 지독한 농담을 던지지만, 그 농담 끝에 남겨진 허무조차 온전히 자신의 몫임을. 비록 피로 이어진 자식은 얻지 못했으나,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해 본 5년의 시간은 그의 영혼 어딘가에 지워지지 않는 무늬를 남겼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바람이 불어와 동훈의 코끝을 스쳤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민준의 작은 미니카를 가만히 쥐었다. 그리고 길고 긴 한숨과 함께,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거리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텅 빈 방안을 한 바퀴 휘감고 나갔다. 주인을 잃은 파란 미니카가 놓인 책상 위로, 가느다란 달빛이 내려앉았다. 혼자 남겨진 방.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니었다. 낡은 허물을 벗어던진 한 남자가 다시 시작하기 위해 비워둔, 아주 작고 고요한 출발지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차 소리를 배경으로, 동훈의 뒷모습은 서서히 밤의 풍경 속으로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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