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좁은 8평 원룸의 공기는 언제나처럼 습하고 무거웠다. 동훈은 퇴근 후 낡은 와이셔츠를 벗으며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저녁 8시. 평소라면 혜진이 차려놓은 소박한 밥상 앞에 앉아 민준의 재롱을 보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날, 혜진은 밥상 대신 식탁 위에 하얀 봉투 하나를 올려두고 동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훈 씨, 잠시 얘기 좀 해요."
혜진의 목소리는 지난 6개월간 들어본 것 중 가장 차분하고 단호했다. 동훈은 불길한 예감을 누르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민준이 학원 원장님이에요. 그 사람과 재혼하기로 했어요."
순간, 동훈의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재혼? 혜진아, 우리 지금 이 생활이 뭐라고 생각해? 내가 너를 용서하고, 우리가 다시 시작하기로 한 지 이제 겨우 반 년이야." 
"아니요, 동훈 씨. 당신은 나를 용서한 적 없어요. 이 좁은 방에서 당신의 차가운 눈초리를 견디며, 나는 매일 숨이 막혔어요. 이건 재결합이 아니라 유예된 사형 선고였죠. 그리고... 무엇보다 민준이를 위해서예요."
'민준이를 위해서'. 혜진이 꺼내 든 그 명분은 동훈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미혼이고, 민준이를 자기 자식처럼 키우고 싶어 해요. 법적으로도 완벽한 아빠가 되어주겠대요. 이 좁은 원룸에서, 성바지도 불분명한 상태로 당신의 눈치를 보며 자라는 것보다... 그게 아이에게 더 나은 환경 아닐까요?"
동훈은 반박하고 싶었다. 내가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혜진의 다음 말이 동훈의 목을 죄었다.
"기억하죠? 우리 재결합할 때 쓴 조건. 누구에게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미련 없이 떠나기로 한 거. 이제 그 유효기간이 다 된 것 같아요."
동훈은 자신이 직접 제안했던 그 '떠나기 조건'이 사실은 자신의 심장을 겨누고 있던 칼날이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혜진을 구속하기 위해 그 조건을 만들었으나, 이제 혜진은 그 조건을 열쇠 삼아 자유를 향해 문을 열고 있었다. 며칠 뒤, 혜진은 아이의 짐을 옮기기 전 동훈을 진우의 아파트로 초대했다. 민준이 앞으로 살게 될 환경을 확인시켜 주겠다는 배려였지만, 동훈에게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처형대처럼 느껴졌다. 도착한 곳은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신축 대단지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였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은은한 편백 향기와 대리석 바닥의 서늘한 매끄러움이 동훈을 압도했다. 48평. 자신의 원룸을 대여섯 개는 이어 붙여야 나올 법한 광활한 거실이 펼쳐졌다.
"어서 오세요, 민준이 아버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진우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그는 동훈보다 젊었고, 얼굴에는 고생의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윤기가 흘렀다. 무엇보다 그의 눈빛은 동훈처럼 의심이나 증오로 얼룩져 있지 않았다. 동훈은 거실 한복판에 서서 자신의 초라함을 실감했다. 자신의 집에서는 아이가 장난감 기차를 세 번만 굴려도 벽에 부딪혔지만, 이곳에서 민준은 마치 끝없는 벌판을 달리는 강아지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아이는 이미 진우가 사준 거대한 트램펄린 위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고 있었다.
"아빠! 여기 진짜 좋아! 내 방에 침대도 자동차 모양이야!"
민준이 동훈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아빠'라는 호칭이 진우의 아파트 안에서 메아리쳤다. 동훈은 그 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이 공간의 주인인 진우를 부르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진우는 동훈을 다이닝룸으로 안내했다. 최고급 원목 식탁 위에는 동훈이 한 달 월급을 털어도 사기 힘든 빈티지 와인이 놓여 있었다.
"민준이 알레르기 문제는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아는 대학병원 인맥을 통해 이미 전담 팀을 꾸려뒀습니다. 주거 환경도 공기청정 시스템을 풀가동하고 있고요. 혜진 씨와 민준이, 이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진우의 말은 정중했지만,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승리자의 권위가 서려 있었다. 동훈은 와인 잔에 담긴 붉은 액체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원룸 냉장고 구석에서 차갑게 식어가던 캔맥주가 떠올랐다. 이곳의 공기는 쾌적했고, 온도는 완벽했으며, 가구들은 우아했다. 그 모든 완벽함이 동훈에게는 독처럼 다가왔다. 동훈은 화장실로 피신했다. 거울 속의 남자는 낡은 양복에 초췌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8평짜리 동굴 속에서 증오와 그리움을 자양분 삼아 연명하던 괴물의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민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기억'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진우는 민준에게 '미래'를 줄 수 있었다. 더 넓은 방, 더 좋은 치료, 그리고 법적으로 당당한 아버지가 있는 삶. 거실로 돌아온 동훈의 눈에 혜진의 옆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진우의 곁에서 안정을 찾은 듯 보였다. 동훈의 원룸에서 늘 죄인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그녀가 아니었다.
"동훈 씨, 이제... 보내줄 수 있죠?"
혜진의 물음에 동훈은 대답 대신 민준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진우가 건네준 최신형 태블릿 PC에 열중해 있었다. 동훈이 퇴근길에 사 가던 오백 원짜리 막대사탕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한 유혹. 동훈은 깨달았다. 자신이 쌓아 올린 '용서의 성'은 너무나 비좁고 낡아서, 더 이상 사랑하는 이들을 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자신이 만든 계약서의 조항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떠난다.'
그 조항은 동훈의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되었고, 동시에 혜진에게는 가장 완벽한 면죄부가 되었다. 동훈은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 법적으로 그는 이미 남남이었고, 생물학적으로도 타인이었다. 유일하게 그들을 묶어주던 '추억'마저 이 거대한 아파트의 화려함 앞에서는 초라한 잡동사니처럼 보였다.
"그래... 잘 살아라."
동훈은 쥐어짜듯 말을 내뱉고는 도망치듯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육중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쾅' 하고 울렸다. 그 소리는 동훈의 인생에서 한 챕터가 영원히 소멸했음을 알리는 조종과 같았다. 밤거리에 홀로 선 동훈은 갈 곳을 잃었다. 다시 그 비좁고 눅눅한 8평 원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그 작은 구덩이뿐이었다.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져버린 남자의 뒷모습 위로, 차가운 도시의 불빛만이 비정하게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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