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평 원룸의 공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평소라면 혜진이 분주하게 저녁을 준비하고, 민준이 좁은 방안을 뛰어다니며 활기를 불어넣었겠지만, 오늘 밤의 정적은 죽음보다 무거웠다. 방 한가운데에는 입을 벌린 커다란 캐리어들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혜진과 민준의 옷가지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마지막인데... 맛있는 거라도 사 올걸 그랬나."
동훈이 벽에 기댄 채 멍하니 입을 열었다. 혜진은 짐을 싸던 손을 멈추지 않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냉장고에 남은 재료로 대충 차렸어요. 남기고 가면 짐만 되니까."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와 정갈한 밑반찬 몇 가지가 놓였다. 지난 6개월간 매일같이 보아온 소박한 밥상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 찌개 냄새가 동훈의 코끝을 맵게 찔렀다. 세 사람은 접이식 탁자에 둘러앉았다. 무릎이 부딪힐 정도로 좁은 이 탁자가 사실은 그들을 이어주던 유일한 섬이었다는 것을, 동훈은 이제야 실감했다.
"아빠, 나 내일 진짜 큰 집으로 이사 가? 거기 가면 내 전용 수영장도 있어?"
민준이 수저를 든 채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아빠'라는 단어가 공기를 가르고 동훈의 고막에 박혔다. 동훈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민준아. 거기 가면 민준이 방도 엄청 넓고, 장난감도 훨씬 많을 거야. 아빠가 말했지? 우리 민준이는 왕자님이라서 큰 성에서 살아야 한다고." 

"그럼 아빠도 같이 가는 거지? 아빠 방은 내 방 옆이야?"
동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이가 "아빠"라고 부를 때마다, 동훈의 내면에서는 거대한 댐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자신은 아빠가 아니었다. 5년을 키웠고, 지난 6개월간 지옥 같은 고통을 견디며 곁을 지켰지만, 그는 법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이 아이의 인생에 단 한 줄의 근거도 남기지 못한 '타인'일 뿐이었다.
"아빠는... 여기서 할 일이 좀 많아. 민준이가 그 성을 잘 지키고 있으면, 아빠가 나중에 보러 갈게."

거짓말이었다. 혜진과 진우의 결혼이 확정되면, 동훈은 민준을 볼 자격조차 잃게 될 것이다. 혜진은 묵묵히 밥을 먹으며 동훈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눈가도 붉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결심한 듯 보였다. 식사를 마친 뒤, 혜진은 마지막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동훈은 민준을 침대 맡으로 불러 앉혔다.
"민준아, 아빠가 마지막으로 동화책 읽어줄까?" 
"응! 그 괴물 나오는 책 읽어줘!"

민준이 동훈의 무릎 위로 폴짝 올라앉았다. 아이의 묵직한 체중과 따스한 온기가 동훈의 허벅지를 타고 전해졌다. 동훈은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내일이면 이 온기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동훈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숲속을 헤매던 작은 아이가 결국 집을 찾아가는 평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동훈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목이 메어 자꾸만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래서... 아이는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단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민준은 동훈의 품에 기대 잠이 들어 있었다. 고른 숨소리가 동훈의 가슴팍에 닿았다. 동훈은 잠든 아이의 얼굴을 훑어 내려갔다. 속눈썹의 길이, 콧날의 각도, 입술의 모양... 이 모든 조각들을 마음속 사진첩에 새겨 넣으려는 듯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가지 마라. 그냥 내 곁에 있어 주면 안 되겠니.'

심장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동훈은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었다. 그는 혜진에게 "누구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떠나자"는 잔인한 조건을 내걸었던 장본인이었다. 스스로 만든 그 오만한 계약서가 이제는 그의 사지를 묶는 쇠사슬이 되어 있었다. 혜진이 캐리어의 지퍼를 닫는 소리가 들렸다. 지익, 하는 금속음이 마치 두 사람의 인연을 끊어내는 소리처럼 날카롭게 울렸다.
"준비 다 됐어요. 민준이는 내가 안고 나갈게요."

혜진이 다가와 잠든 민준을 받아 안으려 했다. 동훈은 잠시 아이를 놓지 못하고 버텼다. 혜진의 눈과 동훈의 눈이 마주쳤다. 혜진의 눈에는 미안함과 단호함, 그리고 아주 약간의 연민이 섞여 있었다.
"동훈 씨, 이제 그만 놓아줘요. 당신도... 이제 당신 인생 살아야지. 여기 계속 갇혀 있지 말고."
동훈은 힘없이 팔을 풀었다. 아이의 무게가 사라지자, 그의 가슴에는 차가운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혜진은 아이를 능숙하게 안아 올리고 캐리어를 끌었다. 좁은 현관문이 열리고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갈게요. 건강해요."
혜진의 마지막 인사가 짧게 남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 잠결에 민준이 웅얼거렸다.
"아빠... 안녕..."
쾅.

문이 닫혔다. 8평 원룸은 다시 6개월 전처럼 완벽한 고요에 잠겼다. 동훈은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방 안에는 여전히 혜진이 끓인 된장찌개 냄새가 감돌았고, 민준이 읽던 동화책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없었다. 동훈은 바닥에 흩어진 민준의 작은 양말 한 짝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어 얼굴을 묻었다. 아이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아빠라고 했잖아... 나보고 아빠라고 불렀잖아..."
동훈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법이 뭐라고, 피가 뭐라고. 5년의 세월과 6개월의 처절한 몸부림이 종이 한 장과 타인의 재력 앞에 이토록 무력하게 부서질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이제 정말 혼자였다. 넓은 아파트에서 쫓겨나 좁은 원룸으로 숨어들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춥고 외로웠다. 그때는 증오라는 동력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증오마저 잃어버린 채 텅 빈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었다. 동훈은 어둠 속에 덩그러니 놓인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비참한, 아빠가 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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