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원을 빠져나와 집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았다. 차 안의 공기는 마치 진공상태처럼 희박했고, 동훈의 거친 숨소리만이 엔진 소음보다 크게 들릴 뿐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거실 불을 켜는 동훈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환하게 밝아진 거실, 그곳엔 여전히 민준이 아침에 놀다 만 로봇 장난감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평화로운 풍경이 이제는 기괴한 조롱처럼 느껴졌다.
동훈은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았다. 아니, 무너져 내렸다는 표현이 맞았다. 식탁 의자에 겨우 몸을 기대고 선 혜진을 향해 동훈이 낮게 읊조렸다.
“말해.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아주 상세하게.”
동훈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분노가 극에 달해 오히려 감정이 얼어붙은 듯한, 소름 끼치는 평온함이었다. 혜진은 바닥만을 응시하며 어깨를 들먹였다. 정적이 흐를수록 동훈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누구야? 언제부터야? 아니, 애초에 나랑 결혼할 생각은 있었던 거야?”
동훈의 사자후가 거실 벽을 때렸다. 혜진은 그제야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동훈 씨. 죽을죄를 지었어….”
“미안하다는 말은 사과가 아니라 확인 사살이야. 그딴 말 말고 사실을 말하라고!”
혜진은 젖은 목소리로 6년 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동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대를 품고 신혼집 인테리어를 고민하던, 결혼식을 불과 세 달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혜진은 원인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남자와 평생을 함께한다는 확신 뒤에 숨은 ‘나’라는 존재의 상실감, 그리고 ‘결혼’이라는 거대한 제도 속으로 편입된다는 공포. 소위 말하는 ‘메리지 블루(Marriage Blue)’였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밤잠을 설치던 그녀에게, 1년 동안 동거하며 뜨겁게 사랑했지만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헤어졌던 전 남자친구 ‘준수’가 연락해 왔다.
“그냥… 한 번만 보고 싶었어. 이 불안함을 그 사람은 이해해 줄 것 같았어. 그러면 안 되는 거 알면서도, 내 마음이 갈 곳이 없어서….”
혜진의 고백은 잔인했다. 동훈과 함께 살 신혼집 가구를 보러 다녀온 저녁, 혜진은 잠시 친구를 만난다는 핑계로 준수를 만났다. 익숙한 품, 익숙한 위로. 그 찰나의 일탈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서너 차례 이어졌다. 그리고 민준이 생겼다. 혜진은 당연히 동훈의 아이라 믿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날짜상으로도 미묘하게 겹쳐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부도덕함을 ‘운 좋은 착각’ 뒤에 숨겼다.
“임신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어. 동훈 씨 아이일 거라고,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믿고 싶었어. 준수랑은 그 이후로 정말 단 한 번도 연락 안 했어. 맹세해!”
“맹세? 지금 네 입에서 맹세라는 말이 나와?”
동훈은 헛웃음을 지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민준의 태동을 느끼며 혜진의 배에 귀를 대고 태담을 들려주던 그 밤, 혜진은 속으로 누구를 떠올렸을까. 아이의 백일 잔치에서, 돌잔치에서, 행복한 아빠의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광대였을지 생각하자 구역질이 났다.
“넌 5년 동안 나를 속인 게 아니야. 내 인생 자체를 모욕한 거지. 내가 민준이를 위해 포기한 기회들, 내가 쏟아부은 그 지독한 사랑들… 그게 다 누구를 위한 거였는데!”
동훈은 거실 탁자를 발로 걷어찼다. 유리 잔들이 바닥에 떨어져 비명처럼 산산조각 났다. 혜진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동훈은 숨을 헐떡이며 혜진을 내려다보았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해 보였던 여자가, 이제는 추악한 위선의 덩어리로 보였다.
“나가.”
동훈이 내뱉은 말은 짧고 단호했다.
“동훈 씨, 제발… 민준이를 봐서라도….”
“내 아들 아니잖아! 그 애 이름 부르지 마! 내 집에서, 내 인생에서 당장 꺼져!”
동훈은 곧장 서재로 들어가 서류 봉투를 꺼내왔다. 이미 병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머릿속으로 정리해둔 절차였다. 그는 법률 자문을 하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남겼고, 이혼 서류 서식을 출력했다.
“이혼 소송, 그리고 친자 부존재 확인 소송. 내일 바로 접수할 거야. 위자료? 재산 분할? 꿈도 꾸지 마. 네 몸만 나가. 아니, 네 배 속에서 나온 그 아이만 데리고 당장 나가.”
혜진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동훈을 바라보았다. 동훈의 눈에는 더 이상 자비나 애정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타인을 보듯 차갑고 낯선 시선뿐이었다. 혜진은 떨리는 손으로 안방에서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꺼내왔다. 옷가지를 쑤셔 넣는 소리, 아이의 장난감을 챙기며 흐느끼는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짐을 다 싼 혜진이 민준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고 있던 아이를 깨워 겉옷을 입히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어디 가? 아빠는?”
민준의 잠투정 섞인 목소리에 동훈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달려가 아이를 안고 “아빠 여기 있어”라고 말하고 싶은 본능이 꿈틀댔다. 하지만 그 본능은 곧 차가운 이성에 의해 난도질당했다. ‘저 아이는 내 피가 아니다. 저 아이는 배신의 증거다.’ 혜진이 아이의 손을 잡고 거실로 나왔다. 민준은 겁에 질린 눈으로 깨진 유리 조각과 아빠의 무서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혜진은 현관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미안해… 정말….”
동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를 보지도 않았다. 쾅, 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6년 전, 설렘과 희망을 안고 함께 들어왔던 그 문이 이제는 영원한 단절을 고하며 닫혔다. 혜진과 아이가 떠난 뒤, 넓은 집에는 죽음 같은 고요함만이 내려앉았다. 동훈은 거실 한복판에 홀로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세 식구가 살던 집이었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벽지마다 배어 있고, 아내의 향기가 커튼 끝에 매달려 있는 곳. 하지만 이제 이곳은 집이 아니라, 잘 꾸며진 거대한 무덤이었다. 동훈은 바닥에 주저앉아 조각난 유리 파편을 손으로 쥐었다. 손바닥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 속이 이보다 수만 배는 더 아팠으니까. 완벽했던 유리 성의 잔해 위에서, 동훈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텅 빈 복도를 타고 공허하게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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