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화려한 마천루 뒤편, 노후한 빌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역삼동의 어느 뒷골목에는 유독 이질적인 공간이 하나 있다. 낡은 건물 1층, 낮게 윙윙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24시간 하얀 형광등 불빛을 내뿜는 '화이트 버블 24' 무인 세탁소다. 주변 식당들이 문을 닫고 취객들의 발소리마저 잦아드는 새벽이 되면, 이곳은 기묘한 정적에 휩싸인다. 하지만 인근 고시원 거주자들이나 자취생들 사이에서는 이곳에 관한 불길한 '메뉴얼' 하나가 암암리에 떠돌고 있었다.
'경고: 이용객 필독 사항'
• 새벽 3시 14분, 4번 건조기가 작동 중이라면 즉시 매장을 나가십시오.
• 작동 중인 4번 건조기 내부를 확인하려고 들여다보지 마십시오.
• 건조기 유리창에 '붉은 얼룩'이 보인다면, 그것은 세제 찌꺼기가 아닙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귀가하십시오.
취업 준비만 3년째,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던 지훈은 이 경고를 인터넷 커뮤니티의 흔한 낚시글 정도로 치부했다. 당장 내일 있을 면접에 입고 갈 셔츠가 부족했던 그에게는 괴담보다 '당장 입을 옷'이 더 절실했다. 지훈이 세탁소의 무거운 유리문을 밀고 들어선 것은 새벽 3시 5분이었다. 매장 안은 세제 특유의 인공적인 향기와 건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눅눅한 열기로 가득했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지훈은 익숙하게 세탁기에 빨래를 집어넣고 스마트폰 게임에 몰두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세탁소 안의 모든 소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돌아가던 세탁기도, 천장의 환풍기도 멈춘 듯한 절대적인 정적. 지훈이 고개를 들어 벽면의 디지털시계를 보았다.
[ 03 : 14 ]
숫자가 깜빡이지도 않고 멈춰 있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육중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쿠궁, 쿠궁, 쿠궁...
매장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4번 건조기였다. 분명 비어있던 기계였다. 지훈이 들어올 때만 해도 문이 열린 채 텅 비어있던 그곳이,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버튼을 누른 것처럼 거칠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훈은 마른침을 삼켰다. 머릿속에서는 당장 나가라는 경고문이 떠올랐지만, 인간의 근원적인 호흡을 자극하는 호기심이 그의 발을 4번 건조기 앞으로 이끌었다.
"뭐야, 누가 장난치는 건가?"
건조기 유리창 너머로 무언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것은 강렬한 선홍색이었다. 거칠게 회전하는 드럼 내부에서 정체 모를 '빨간색 코트' 한 벌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건조기는 세탁물의 물기를 말리는 기계다. 하지만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코트는 젖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바싹 말라 있어 비명 지르는 듯한 거친 마찰음을 냈다. 그리고 그 코트가 유리창에 툭, 툭 부딪힐 때마다, 안쪽에서부터 검붉은 액체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유리창을 적셨다. 비릿한 금속성 냄새가 건조기 틈새로 새어 나왔다. 그것은 명백한 피 냄새였다.
지훈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려 했다. 하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유리창에 번진 피사체 사이로, 코트의 소매가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유리창을 향해 뻗어 나왔다.
깡!
마치 단단한 뼈가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어지는 소리는 더욱 소름 끼쳤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유리를 긁어내리는 소리. 끼이익, 끼이익. 그리고 펄럭이던 코트의 소매가 갑자기 쫙 펴지더니 유리창 안쪽을 '탁' 하고 짚었다. 그것은 옷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누군가 코트 안에 들어가 손바닥으로 유리를 밀어내는 듯한 형상이었다. 지훈은 보았다. 코트의 목 부분, 텅 비어 있어야 할 그곳에 퀭한 눈구멍 두 개가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다음 날 아침 8시, 세탁소 점주 최 씨는 평소처럼 매장 점검을 위해 문을 열었다. 매장 안은 평온했다. 밤새 누군가 다녀간 듯 세탁기 하나가 문이 열린 채 멈춰 있었고, 바닥에는 세탁물 바구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최 씨의 시선이 4번 건조기로 향했다. 건조기는 멈춰 있었고 내부 역시 깨끗이 비어 있었다. 하지만 최 씨는 익숙한 듯 한숨을 내쉬며 청소 도구를 꺼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그것'이 찾아온다는 것을. 건조기 문을 열자,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지훈의 주민등록증과 면접 수험표였다.
최 씨가 건조기 안쪽을 살피자, 어제까지는 없던 선명한 흔적들이 발견됐다. 강화유리로 된 안쪽 벽면과 스테인리스 드럼 사방에, 마치 인간이 손톱으로 필사적으로 탈출하려고 발버둥 친 듯한 깊은 스크래치가 수백 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스크래치 틈새마다 굳어버린 살점과 검은 피가 끼어 있었다.
"또 한 명 갔군..."
최 씨는 무감각한 표정으로 지훈의 소지품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매장 한구석에 있는 '경고문'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그날 밤, 새벽 3시 14분. 적막에 싸인 세탁소에 다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4번 건조기가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 안에서 돌고 있는 것은 빨간 코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제 지훈이 입고 나갔던, 가슴팍에 대학 로고가 선명히 박힌 파란색 후드티였다. 후드티는 텅 빈 채로 회전하다가도, 어느 순간 누군가 들어있는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유리창에는 다시 검붉은 액체가 튀기 시작했고, 파란 소매는 유리를 거칠게 두드렸다. 마치 억울함을 호소하는 지훈의 비명처럼.
지금도 강남의 그 세탁소 4번 건조기 옆에는 누군가 버리고 간 듯한 빨래 바구니들이 쌓여 있다. 만약 당신이 새벽에 빨래방을 찾게 된다면, 그리고 우연히 시계를 보았는데 '3시 14분'에 멈춰 있다면, 절대 구석진 곳의 건조기를 보지 마라. 그 안에서 돌고 있는 다음 세탁물은, 당신이 오늘 입고 있는 바로 그 옷이 될지도 모르니까.

무인 세탁소의 편리함 뒤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적막함이 숨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동네 세탁소에는 혹시 번호가 유독 닳아 있는 건조기가 있나요? 있다면, 새벽에는 절대 그곳을 이용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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