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결정적 단서, 80도의 잔류 온도
사무실의 공기가 일순간 멈췄다. 탕비실 입구에서 들려온 그 웅장하고도 고소한 "꺼어어억—" 소리. 그것은 단순한 생리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파나마 게이샤의 화사한 산미와 박 과장의 설탕, 그리고 이 대리의 우유 거품이 한데 어우러져 한 남자의 위장 속에서 격렬하게 반응하며 내뱉은 ‘최종 승전보’와 같았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박 부장, 우리 팀의 절대 권력자이자 나를 부장실로 호출했던 바로 그 ‘불곰’이었다.
박 부장은 입가에 묻은 미세한 하얀 흔적을 손등으로 슥 닦아내며 우리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김 대리! 서류 수정하느라 고생했어. 그런데 자네 자리에 있던 그 '샘플' 말이야. 아주 맛이 좋더군!"
나는 머리가 띵해졌다. 샘플? 무슨 샘플?
"아, 부장님... 그거 말씀입니까? 제가 아침부터 정성 들여 내린..."
"아니, 이 대리가 그러던데? 김 대리가 우리 팀원들 사기 진작 차원에서 특수 제작한 '에너지 보충용 라떼 샘플'이라고! 맛이 좀 시큼하길래 상했나 싶었는데, 설탕도 들어있고 거품도 몽글몽글한 게 아주 별미야. 내가 마침 목이 타서 한 입에 털어 넣었지. 역시 김 대리, 센스 있어! 내일부터 매일 한 잔씩 부탁하네!"
나는 고개를 돌려 이 대리를 보았다. 이 대리는 이미 모니터에 코를 박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세로 투명인간 모드에 돌입해 있었다. 아마도 지훈의 소중한 커피를 '라떼'로 개조하다 부장님과 마주치자,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직원용 샘플"이라는 희대의 거짓말을 시전한 모양이었다. 결국 내 게이샤는... 박 과장의 설탕으로 신성이 더럽혀지고, 최 사원의 손에 의해 강제로 이송되었으며, 이 대리의 전동 거품기로 고문을 당한 뒤, 최종적으로 박 부장의 식도를 타고 장렬히 전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 매니아적 뇌세포가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부장님, 잠시만요. 그 커피... 마실 때 뜨겁지 않으셨나요?"
박 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털털하게 웃었다. "뜨겁긴! 아주 미지근하니 마시기 딱 좋던데? 설탕이 씹히는 맛도 일품이고 말이야."
여기서 나는 결정적인 모순을 발견했다. 내가 추출한 온도는 정확히 93도. 부장실에서 보낸 시간은 15분. 비록 듀얼 모니터의 열기가 닿는 명당에 두었다 하더라도, 이 대리가 우유 거품을 올릴 때 쓴 우유는 냉장고에서 갓 꺼낸 차가운 것이었을 터다. 물리학적으로 계산했을 때, 93도의 커피 180ml에 차가운 우유 거품을 올리면 온도는 순식간에 떨어지지만, 여전히 60도에서 65도 사이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박 부장은 평소 국밥도 10분은 식혀 먹는 지독한 '고양이 혀(뜨거운 것을 못 먹는 사람)'의 소유자다. 그가 "미지근해서 원샷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나는 다시 내 책상으로 달려가 빈 잔을 들어 올렸다.
잔 바닥을 손바닥으로 감지했다. 차갑다. 심지어 잔 안쪽에는 얼음이 녹아 생긴 듯한 아주 미세한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이건... 아이스잖아?"
나는 다시 용의자들을 훑었다. 박 과장은 뜨거운 믹스만 마신다. 최 사원도 상온의 부스터를 즐긴다. 이 대리는 거품을 냈을 뿐이다. 그렇다면 누가 여기에 얼음을 넣었단 말인가? 나는 정 주임의 자리를 다시 살폈다. 그의 책상 위 텀블러에는 얼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밑 쓰레기통에서 나는 보았다. 내가 린싱할 때 썼던 종이 홀더와 함께 버려진 '헤이즐넛 시럽' 파우치를.
"정 주임님... 당신이었군."
정 주임이 어깨를 움찔하며 마우스를 놓쳤다.
"정 주임님은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죠. 이 대리님이 라떼를 만들어 놓고 자리를 비운 그 3분. 주임님은 그 뜨거운 '혼종 커피'를 도저히 그냥 마실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자기 텀블러에 있던 얼음을 쏟아붓고, 심지어 본인이 좋아하는 헤이즐넛 시럽까지 추가했죠? 하지만 그 순간 부장님이 나타나셨고, 주임님은 당황해서 잔을 부장님께 상납한 겁니다. '시원한 샘플입니다'라고 하면서!" 사무실의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1. 나(김 대리): 93도의 완벽한 게이샤를 내림.
2. 박 과장: 설탕을 투하해 산미를 말살함.
3. 최 사원: 싱크대에 버리려다 이 대리에게 뺏김.
4. 이 대리: 우유 거품을 올려 라떼로 개조함.
5. 정 주임: 뜨겁다며 얼음과 헤이즐넛 시럽을 섞어 '괴식'으로 만듦.
6. 박 부장: 그걸 '영양 샘플'인 줄 알고 시원하게 들이킴.
내 100g에 수십만 원 하던 파나마 게이샤 에스메랄다는 그렇게 사무실 직원 5명의 손을 거치며 ‘설탕-헤이즐넛-아이스-라떼’라는 정체불명의 오물로 변해 사라진 것이다.
"하... 하하하..."
나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잔 바닥에 남은 80도의 잔류 온도는커녕, 차갑게 식어버린 얼음물의 흔적만이 나의 집착을 비웃고 있었다.
나는 빈 잔을 들고 탕비실로 향했다. 동료들은 내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나는 잔을 깨끗이 씻고, 가방 깊숙한 곳에서 또 다른 원두 봉지를 꺼냈다. 이번엔 '인도네시아 만델링'. 흙내음이 강하고 쓴맛이 지옥처럼 묵직한, '인생의 쓴맛'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녀석이다. 나는 평소보다 더 높은 96도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다들 커피 좋아하시죠? 이번엔 제가 진짜로 '직원용 샘플'을 넉넉히 준비했습니다."
내 목소리에 박 과장과 정 주임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80도의 미지근한 배신은 끝났다. 이제 96도의 진실한 쓴맛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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