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빈 잔의 비극, 증발한 아로마

  부장실의 문을 열고 나왔을 때만 해도, 내 코끝에는 여전히 잔향이 남아 있었다. 93도의 열기로 피어올라 내 뇌세포 구석구석을 재스민 향으로 코팅했던 그 완벽한 액체. 하지만 내 책상 앞에 도착한 순간, 세계는 흑백으로 변했다.
  "없어... 증발했어."
  내 본차이나 잔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듀얼 모니터 뒤편, 본체의 따스한 열기가 흐르는 그 은밀한 명당자리. 하지만 잔 안은 냉혹했다. 핥아먹은 듯 깨끗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주 미세한 갈색 테두리만이 잔 바닥에 원을 그리며 나를 비웃고 있었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귀한 게이샤 에스메랄다는 점성이 낮아 자연 증발하려면 적어도 48시간은 소요된다. 내가 부장실에서 불곰 부장의 침 튀기는 훈계를 들은 시간은 단 15분. 즉, 누군가 '인위적'으로 이 액체를 제거했다는 뜻이다. 그것도 아주 신속하고, 잔인하게.

  나는 코를 킁킁거리며 잔 주위의 공기를 흡입했다. 아, 미세하게 남아 있는 베리류의 산미... 하지만 그 향기 뒤편으로 낯설고 불길한 '생활취'가 섞여 들어왔다. 누군가의 타액과 섞여 변질된, 타락한 게이샤의 단명(短命).
  "범인은 이 칸막이 안에 있다."
  나는 돋보기를 꺼내는 탐정의 심정으로 자리에 앉아, 노트북 대신 '커피 수사 일지'를 펼쳤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1.2미터 높이의 칸막이 너머를 살폈다. 평화로워 보이는 사무실. 하지만 내 레이더망에는 다섯 명의 포식자가 포착되었다.

  용의자 1: 박 과장 – '카페인 깡패'
  내 바로 옆자리. 그는 지금 미친 듯이 마우스를 클릭하며 '광클'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평소라면 믹스커피 봉지 뜯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조용하다. "과장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내 질문에 박 과장이 움찔하며 돌아봤다. 그의 눈이 평소보다 1.5배는 더 충혈되어 있다. "어? 아, 김 대리 왔어? 어우, 갑자기 기운이 펄펄 나네! 일할 맛이 나! 하하하!"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린다. 게이샤의 고농도 카페인이 그의 심장을 드럼처럼 두드리고 있는 건 아닐까?

  용의자 2: 최 사원 – '단백질 빌런'
  저 멀리 구석 자리에서 아령을 들고 이두박근을 체크하고 있는 신입. 그는 커피를 '각성용 부스터'로만 본다. "최 사원, 아침에 커피 마셨나?" "아뇨, 대리님. 전 오늘 공복 유산소라 블랙만 마시려고 했는데, 마침 탕비실 커피가 떨어졌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참았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웃으며 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텀블러 뚜껑에 맺힌 갈색 물방울은 무엇인가? 단백질 쉐이크 치고는 지나치게 맑은 호박색인데.

  용의자 3: 정 주임 – '공짜 하이에나'
  내 대각선 자리. 그는 지금 탕비실에서 가져온 공짜 사탕을 까먹고 있다. "정 주임, 혹시 내 자리에 누구 오는 거 못 봤어?" 정 주임은 사탕을 오물거리며 멍한 눈으로 나를 봤다. "글쎄요... 전 오늘 엑셀 작업하느라 앞만 봐서요. 아, 근데 아까 향기가 너무 좋아서 누가 방향제 뿌린 줄 알았어요. 꽃집 온 줄 알았네." 방향제? 감히 신의 눈물을 방향제로 치부하다니. 하지만 그의 무신경한 말투 뒤에 '몰래 마시고 입 싹 닦기'의 달인다운 면모가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

  용의자 4: 이 대리 – '인스타 감성러'
  그녀는 지금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열심히 보정하고 있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내가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본차이나 잔이 놓여 있다. "이 대리님, 오늘 커피 향 어때요?" "어머, 김 대리님! 아까 그 향기 게이샤 맞죠? 전 멀리서 향기만 맡아도 알겠던데. 정말 우아하더라고요." 지나치게 구체적인 찬사. 원래 범인은 현장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법이다. 그녀의 입술에 묻은 립스틱이 내 잔 가장자리에 남은 미세한 흔적과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용의자 5: 한 사원 – '다이어트 광신도'
  막내 한 사원은 지금 오이를 씹고 있다. "한 사원, 커피 좋아하나?" "저 요즘 액상 당류 끊어서 블랙만 마셔요. 근데 블랙커피는 너무 써서 마시기 힘들더라고요. 대리님 커피는 왠지 달콤한 냄새가 나던데, 설탕 넣으신 거예요?" 설탕이라니! 게이샤에 설탕을 넣는 건 피카소의 그림에 크레파스로 덧칠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녀가 호기심에 한 모금 마셨다가 '어? 안 쓰네?' 하고 다 마셔버렸을 확률도 배제할 수 없다.

  나는 다시 내 잔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때였다. 잔 바닥, 옅은 갈색 얼룩 사이로 무언가 반짝이는 조각이 보였다.
  "이건... 설탕 알갱이?"
  나는 절대 커피에 설탕을 넣지 않는다. 그런데 왜 내 잔 바닥에 녹지 않은 설탕 결정체가 단 한 알, 외롭게 남겨져 있는가? 이것은 범인이 남긴 결정적인 실수이자, 나를 향한 조롱인가?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잔 주위의 서류 뭉치 위로 툭, 하고 떨어진 낯선 액체의 흔적. 그것은 커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유 거품'이었다.

  "이 자식... 내 게이샤를 마신 것도 모자라, 설탕을 넣고 우유까지 섞으려 한 건가?"
  아로마는 증발했고, 내 이성은 폭발했다. 93도의 집착은 이제 피의 복수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범인을 향해 선포했다.
  "여러분, 잠시 주목해주시죠. 지금 이 사무실에 '커피 강도'가 있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다섯 명의 용의자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내 손에 들린 빈 본차이나 잔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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