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93도의 집착, 완벽한 브루잉

대한민국 직장인들에게 커피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침마다 수혈받아야 하는 검은 생명수이자, 상사의 잔소리를 견디게 해주는 법적 허용 마약이며, 영혼을 간신히 육체에 붙여놓는 접착제와 같다. 하지만 나, 김 대리에게 커피는 그런 비루한 생존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이며, 예술이고, 고독한 수행이다. 오전 8시 20분. 사무실엔 아직 적막이 감돈다. 칸막이 너머로 동료들이 출근하기 전, 나는 나만의 신성한 의식을 시작한다. 오늘의 주인공은 ‘파나마 게이샤 에스메랄다 스페셜’. 커피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잔 속에 신의 얼굴이 보인다’고 칭송받는, 100g에 내 하루 일당보다 비싼 귀물 중의 귀물이다. 나는 가방에서 정밀 저울과 수동 그라인더를 꺼냈다. 전동 그라인더의 소음은 신성 모독이다. 오직 손끝으로 전해지는 원두의 저항을 느끼며 드르륵, 드르륵 분쇄할 때, 비로소 원두는 제 속살을 드러낸다.
“아아… 이 향기.”
재스민의 화사한 꽃향기와 잘 익은 복숭아의 산미가 칸막이 안쪽, 가로 세로 120cm의 내 개인 영토를 가득 채웠다. 나는 온도계로 정확히 93도를 맞춘 물을 준비했다. 1도라도 높으면 쓴맛이 신성을 더럽히고, 1도라도 낮으면 산미가 비겁해진다. 나는 종이 필터를 린싱(Rinsing)하고, 분쇄된 원두를 소복이 담았다. 그리고 가느다란 물줄기를 동심원을 그리며 떨어뜨렸다. 뜸 들이기 30초. 원두가 빵처럼 부풀어 오르며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의 호흡과도 같다. 서버에 담긴 액체는 보석처럼 맑은 호박색으로 빛났다. 나는 이 귀한 액체를 영국산 본차이나 잔에 옮겨 담았다. 입술에 닿는 촉감까지 완벽해야 비로소 브루잉은 완성된다. 자, 이제 신의 얼굴을 마주할 시간….
“김 대리!!!! 지금 당장 비품 결산 서류 들고 부장실로 튀어와!!! 안 와?!!!”
칸막이 너머, 평화로운 아침의 정적을 찢는 괴성이 들렸다. ‘불곰’이라는 별명을 가진 박 부장의 사자후였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나는 잔을 입에 대지도 못한 채 멈췄다. 93도로 시작해 지금 딱 마시기 좋은 70도 언저리로 내려온 이 황금 같은 타이밍을!
“어우, 가요! 갑니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귀한 게이샤를 그냥 두고 갈 순 없었다. 나는 잔을 듀얼 모니터 뒤편, 본체 열기가 살짝 닿아 온도가 유지될 만한 은밀한 장소에 숨기듯 놓아두었다.
“금방 올게, 나의 여신님. 기다려줘.”
나는 모니터에 대고 조용히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서류 뭉치를 들고 부장실로 질주했다. 부장실에서의 15분은 지옥이었다. 무능한 불곰 부장은 숫자가 안 맞는다느니, 폰트가 마음에 안 든다느니 하는 영양가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내 머릿속은 오직 식어가는 게이샤의 온도를 계산하는 릴레이 회로가 돌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부장실 문을 박차고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잔이 비어 있었다.
단순히 비어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설거지라도 한 듯 깨끗하게 들이켜고, 심지어 잔 바닥에는 야속하게도 옅은 갈색의 자국만이 비웃듯 남아 있었다. 93도의 집착, 15분의 기다림, 그리고 내 일당의 절반이 누군가의 식도를 타고 사라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칸막이 너머를 살폈다. 우리 팀원은 나를 제외하고 총 5명. 범인은 이 안에 있다.
용의자 1. 박 과장 (믹스커피의 화신)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는 ‘커피란 자고로 노란 봉지’라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그의 책상엔 항상 종이컵과 커피 가루가 흩뿌려져 있다. 지금 그는 평소보다 활기차게 타이핑을 하고 있다. 카페인 과다 섭취의 증상인가?
용의자 2. 최 사원 (근손실 공포증 헬스 보이)
지독한 헬스 마니아. 설탕이 든 음료는 죄악으로 여긴다. 오직 블랙커피만 고집하는 그에게 게이샤는 최고의 천연 부스터였을지 모른다. 지금 그는 텀블러를 흔들며 단백질 쉐이크를 마시고 있다. 입가에 묻은 저 갈색 자국… 단백질인가, 게이샤인가?
용의자 3. 정 주임 (무색무취의 하이에나)
말수가 적고 존재감이 없지만, 탕비실의 간식이 없어지는 속도는 빛보다 빠르다. 무엇이든 ‘공짜’라면 마다치 않는 그가 내 은밀한 잔을 발견했다면? 그는 지금 멍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지만, 왠지 입맛을 다시는 것 같다.
용의자 4. 이 대리 (자칭 미식가)
인스타그램에 카페 투어 사진을 올리는 게 취미인 그녀. 내가 게이샤를 가져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가장 눈을 빛냈던 사람이다. 그녀의 책상 위엔 고급 티슈가 놓여 있다. 혹시 범행 후 입가를 우아하게 닦은 건 아닐까?
용의자 5. 한 사원 (다이어트 중인 막내)
최근 ‘액상 당류 절단’을 선언하며 블랙커피의 세계에 입문했다. 내 커피 노트를 유심히 훔쳐보며 “대리님, 커피에서 진짜 꽃 향기가 나요?”라고 묻던 그녀.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고, 내 게이샤를 죽인다.
“김 대리, 왜 그래? 얼굴이 왜 그렇게 흙빛이야?”
박 과장이 실실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나는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빈 잔을 들어 올렸다.
“누군가… 신의 얼굴을 마셔버렸습니다.”
“어? 신의 얼굴? 아, 그 비싼 커피? 난 아까 니 자리에서 향기 나길래 방향제 뿌린 줄 알았지!”
박 과장의 농담에 나는 확신했다. 범인은 이 근처에 있고, 반드시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93도의 집착은 이제 ‘김 대리의 추리 쇼’로 변모했다. 과연 누가, 어떤 경로로, 왜 내 게이샤를 가져갔을까? 그리고 왜 잔은 제자리에 가져다 놓은 것인가? 이 치밀하고도 뻔뻔한 범인을 잡기 위해, 나는 커피 노트를 펼치고 수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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