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은 가차 없이 흘렀고, 성북동의 그 가파른 언덕길엔 식당 대신 세련된 카페들이 들어섰습니다. 진우의 ‘지우개 식당’은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죠.
그로부터 5년 뒤, 어느 눈부시게 푸른 가을날이었습니다.
서울 시내의 한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에세이 작가가 된 서윤은 자신의 신작 사인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책
제목은 <이유 없이 따뜻한 기억들>이었습니다. 5년 전 그날 이후, 그녀의 머릿속에서 '도준'이라는 이름과 얼굴은 완전히 삭제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엔 늘 설명할 수 없는 온기가 잔금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다음 분 오세요."서윤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낯선 익숙함. 휠체어에 앉아 야윈 모습의 도준이었습니다. 병색이 짙었지만, 그의 눈동자만큼은 5년 전 지우개 식당에서
마지막 스튜를 삼키던 그날처럼 깊고 투명했습니다. 도준은 떨리는 손으로 서윤의 책을 내밀었습니다.
서윤은 펜을 든 채 멈칫했습니다. 분명 처음 보는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남자의 마른 손등을 보는 순간, 심장
부근이 찌릿하게 저려왔습니다. 마치 아주 오래전 잃어버린 퍼즐 조각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기묘한 통증이었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서윤이 물었습니다. 도준은 대답 대신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그녀의 기억 속에서 완벽하게 죽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슬프지 않았습니다. 서윤의 눈동자가 예전보다 훨씬
평온하고 단단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적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잊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 한 줄만 써주실 수 있을까요?"
지워지지 않는 낙인. 서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홀린 듯 하얀 속지에 문장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잊지 않아 줘서 고맙습니다. 당신의 삶이 늘 따뜻하기를. 책을 돌려받은 도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자신이 짊어진 그 지독한 기억의 무게가, 그녀가 쓴 이 다정한 문장 하나로 보상받는
기분이었습니다.
도준이 휠체어를 돌려 멀어지려 할 때였습니다. 서윤이 급히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저기요!" 도준이 멈춰 섰습니다.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녀의 눈에 알 수 없는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우리... 혹시 어디선가 토마토 스튜를 같이 먹은 적이 있나요? 이상해요. 당신을 보니까 갑자기 입안에서 아주 뜨겁고
시큼한 맛이 느껴져서..." 도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습니다. 지우개 식당의 마법은 완벽했지만, 인간의 심장은 뇌보다
훨씬 더 집요한 기록 장치였나 봅니다. 도준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나지막이 답했습니다. "글쎄요. 아마...
아주 맛있는 꿈을 꾸신 게 아닐까요?"
도준은 그대로 인파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서윤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기억은 지워졌으나 사랑의 습관은 남았습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곳엔 여전히, 누군가 밤새 지펴놓은 것 같은 따스한 난로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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